유튜브를 보다 보면 심심치 않게 마주치는 영상이 있다.
5년 뒤면 네 돈은 휴지 조각 된다, 초인플레이션의 서막, 당장 이 자산으로 도망쳐라 같은 빨간 글씨와 자극적인 배경음악.
사실 이런 영상들을 본다고 해서 심장이 덜컥 내려앉지는 않는다.
다만, 이런 공포가 대중에게 소비되는 방식과 그 이면에 숨겨진 논리적 빈틈이 흥미로울 뿐이다.
정말로 내 돈의 가치가 조금씩 떨어지는 게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일일까?
경제의 구조를 뜯어보면, 진짜 비극은 돈이 귀중품이 되었을 때 시작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돈의 어원: 돌고 돌아야 생명이 유지된다
우리는 흔히 화폐를 돈이라고 부른다.
이 말의 어원을 찾아가 보면 흥미로운 지점이 있다.
돈은 "돌고 돈다"는 말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즉, 돈의 본질은 소유나 축적이 아니라 순환에 있다는 뜻이다.
경제학적으로 볼 때 돈은 유기체의 혈액과 같다.
혈액이 온몸을 구석구석 돌아야 산소와 영양분이 공급되듯, 돈도 시장을 돌아야 가치가 창출되고 경제가 숨을 쉰다.
만약 돈이 귀중품이 되어 누군가의 장롱 속에 고여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그것은 혈관 속에서 피가 굳어버리는 혈전과 같다.
피가 돌지 않는 신체 부위가 괴사 하듯, 돈이 돌지 않는 경제는 활력을 잃고 서서히 죽어간다.
돈은 누군가에게 건네지고 다시 돌아오는 과정 속에 있을 때만 비로소 그 생명력을 유지한다.
돈이 보물이 된 나라의 비극
현금 가치가 떨어지지 않는 세상이 천국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세상을 30년 넘게 직접 겪어본 일본의 사례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일본의 잃어버린 30년 동안 엔화는 국민들에게 쓰레기가 아니라 가만히 있어도 가치가 오르는 보물이었다.
일본 내부에서는 물가가 오르지 않거나 오히려 떨어지는 상황이 지속되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돈을 안 쓰고 갖고만 있어도 내일 더 많은 물건을 살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돈이 귀중품대접을 받는 상황이다.
결과는 참혹했다.
사람들은 지갑을 닫았고 기업들은 투자를 멈췄다.
밖에서는 엔화가 싸다고 난리였을지 몰라도, 일본 안에서는 돈이 너무 귀해져서 아무도 쓰지 않는 현상이 벌어졌다.
돈이 쓰레기가 되지 않으려고 버티는 순간, 그 경제라는 유기체는 서서히 말라죽어간다는 것을 일본이 증명한 셈이다.
돈이 보물일 때 미소 짓는 수혜자들
돈이 쓰레기가 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고, 반대로 돈이 보물처럼 대접받기를 원하는 이들은 누구일까?
우선, 대규모 채권 자산이나 고정 금리 예금을 보유한 사람들이다.
채권은 미래에 정해진 금액을 받기로 한 약속이다.
물가가 오르면 내가 미래에 받을 돈의 실제 구매력은 떨어진다.
반대로 물가가 정체되거나 떨어져서 돈이 보물이 되면, 가만히 앉아 있어도 자산의 실질적인 힘은 강해진다.
인플레이션은 이들의 자산을 갉아먹는 존재인 것이다.
또한, 돈이 귀중품이 되는 세상은 자산가들에게 위험이 존재하지 않는 수익을 안겨준다.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거나 공장을 짓는 등의 리스크를 감수하지 않아도, 돈 가치가 알아서 오르기 때문에 투자할 이유가 사라진다.
결국 현금은 쓰레기다라며 공포를 조장하는 목소리의 이면에는, 자신들의 부가 유지되거나 오히려 높아지기를 바라는 열망이 담겨 있을 가능성이 크다.
돈은 적당히 쓰레기여야 세상을 구른다
전 세계 중앙은행이 연 2% 수준의 인플레이션을 목표로 삼는 이유는 명확하다.
돈을 아주 조금씩 타들어 가는 뜨거운 감자로 만들기 위해서다.
들고 있으면 조금씩 손해를 본다는 느낌이 있어야 비로소 돈이 세상 밖으로 나온다.
그래야 누군가는 물건을 사서 기업의 매출을 올리고, 그 매출이 다시 노동자의 월급으로 돌아가는 선순환이 일어난다.
현금은 태생적으로 흐르는 쓰레기가 될 숙명을 타고났다.
그래야만 우리 손을 떠나 세상을 풍요롭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현금이 귀중품이 되어 장롱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그 사회의 청년들은 일자리를 잃고 성장은 멈춘다.
우리가 이런 경제적 전체 맥락과 구조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자극적인 썸네일 뒤에 숨겨진 누군가의 의도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게 될지도 모른다.
공포는 가장 강력한 통제 수단이다.
"돈이 휴지가 된다"는 말에 떨기보다는, 왜 세상이 돈을 계속 흐르게 하려고 설계되었는지 그 구조를 들여다보는 눈이 필요하다.
결국 현금의 가치가 조금씩 닳아 없어지는 것은 경제가 살아있다는 신호다.
진짜 두려워해야 할 것은 돈이 고여서 썩어가는 세상, 즉 돈이 사람보다 더 귀해지는 차가운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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